출판일기

당신을 처음 본 순간

forestof 2021. 3. 17. 12:03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이 남자다, 바로 알았지 ." 

 

 

아내의 말이다. 처음 본 순간 내 운명이 정해졌고, 그 운명을 정한 건 자신이란다. 요건 몰랐지 약 올리듯 생글거리며 해준 말이다. 이런 제길. 내 걸 자기 맘대로 정하다니. 어쩐지 그날 이후로 삶이 이상하더라.

 

그날 점심을 먹고 돌아와 대학원생 연구실에 혼자 앉아 있을 때, 그녀가 들어왔다. 대학원 입시에 관해 물어볼 게 있단다. 이런 이유로 찾아오는 학생은 더러 있었지만, 한 번도 대꾸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세상에! 그렇게나 맑은 눈은 처음 봤다. 

 

 

        "이리 오시죠."

 

 

나란히 앉아, 이 과목은 이렇게 저 과목은 요렇게 준비하시라, 조목조목 적으며 일러주었던 건, 그래, 오직 그 눈빛 때문이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내 운명의 바깥에 있을 것만 같은 그 눈빛! 그렇게 티 없이 맑고 깨끗하고 선한 눈동자가 또 있으랴. 심장은 제멋대로 뛰고 온몸이 뜨거워졌는데, 이제 보니 그게 운명을 팔아넘긴 계약이었을 줄이야. 

 

 


 

첫 만남은 많은 걸 결정한다. 첫인상을 형성하는 데는 고작 3초가 걸리지만, 그 짧은 순간의 인상이 이후의 관계를 좌우한다는 보고가 있다. 첫인상을 정하는 건 외모가 아니라고 한다. 그 사람을 둘러싼 기운, 그의 음성과 몸짓과 태도에서 배어 나오는 정신이 더 크게 작용한단다. 

 

철학사에서 가장 강렬한 만남은 아무래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만남일 것이다. 이 둘은 달리 소개할 필요가 없는, 서양 철학의 대가들이다. 둘은 43살 차이다. 플라톤이 60살이 되었을 때, 17살 어린 청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학교로 찾아왔다. 첫 만남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강렬한 인상을 주긴 했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학생들 중 가장 유명했으나, 말투가 어눌하고 말할 때 혀가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다리는 가늘고 눈은 작았으며, 화려한 옷을 걸치고 반지를 끼고 머리는 짧게 깎았다."

 

 

 

옛 기록에 나오는 말인데, 요점은 아주 촌스럽다는 거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만하고 제멋대로 살았고 남을 조롱하는 버릇을 가진 데다 식탐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플라톤이 받은 첫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았을 게다. 괴나리봇짐 하나 덜렁 들고 상경한 시골 총각, 거칠고 투박하고 모가 난 비호감 학생 정도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플라톤은 그를 총애했다. 어린 제자를 지극 정성으로 감싸주었고 심지어 "아카데메이아의 정신"이라고까지 치켜세웠다. 첫 만남에서도 그는 제자의 가능성을 알아보았을까? 내 아내가 "바로 이 남자야" 하듯이, 그도 "바로 이 녀석이야" 단박에 알아차렸을까?  

 

두 사람이 펼친 역동적인 논의와 활기찬 에너지를 상상해보는 일은 늘 즐겁다. 그들이 20년이나 함께 지냈던 아카데미아의 그 뜨거운 열기를 떠올리면 언제나 가슴이 벅차다. 나도 어깨를 드러낸 그리스 복장을 하고, 그 공간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다. 오늘도 나는 철학사 책을 펼치며 그런 상상에 빠져본다. 독자님께도 일독을 권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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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그나저나 내 운명을 자기 맘대로 정한 아내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당신은 그때 어땠어?"

 

 

나도 가오가 있다. 남자가 첫눈에 반하고 홀라당 넘어가고 그러면 얼마나 쑥맥같은가? '응, 당신이 내 여자라고 나도 느꼈지' 따위로 대답하면, 저 여자 또 얼마나 자화자찬, 기고만장, 희희낙낙할까? 그치만 이번 한 번만은 사실대로 말해 주어야겠다. 좀 아니꼽지만, 그날 처음 만난 그 여인에게 고백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당신 눈빛 하나가  내 영혼을 가져가 버렸지!"